2007/03/10 21:40

박노준 - 이카루스가 되어버린 야구천재

예전에 후추라는 스포츠 사이트가 있었다. 엄청난 필력과 전문적지식을 가진 필진들이 참가한 곳인데 아쉽게도 이제는 그 그들을 볼 수가 없다. 박노준의 후추인터뷰를 어느 블로그에서 구했다.
참 소중한 글이다.

81년부터 내가 변하지 않는것은 베어스팬이라는거다. 코흘리기 초등학생 시절이나 나태해 져가는 34살의 노총각때나 말이다. 박철순의 베어스에 반했고 박노준의 입단을 누구보다도 좋아했으며 박노준의 트레이드로 인해 한동안 야구대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해태,쌍방울의 박노준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해태시절 플레이오프때 결승홈런을 떄린적이 있었지)

베어스시절 1번 타자 박노준..난 아직도 그를 그리워 한다. 그가 보여준 성적은 그저 보통선수보다는 쫌 잘하는 정도였지만 고교 최고 스타가 베어스에서 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80년대 초반 박노준의 인기는 동방신기 정도였다 )

그의 베어스 코칭스탭으로 뛰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오비베어스 유니폼을 공구했는데 백넘버는 당연히 박노준의 18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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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스 시절 박노준 사진 정말 구하기 힘들다 ㅠ.ㅠ

PROLOGUE

지난 20년 넘게 한국 스포츠를 주목해온 팬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선수들의 이름에 관한 생각 말이다.  극히 개인적인 '망상'에 불과하지만, 참 운동 잘 할 것 같이 들리는 이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두 부류로 다시 나뉘어 진다.  '표준형' 그리고 '희귀형 '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강철', '이정훈', '김한수', '김윤환', '김재한', '김용철', '신진식', '신현호'…와 같이 '수', '철', '식', '훈', '호' 자로 끝나는 이름들 중에 수준급 운동 선수가 많이 있는 듯 싶다.  아니, 영락 없는 '표준형 운동선수 이름'인 선수들이 있었다.  반면, '홍명보', '장효조', '황영조', '김동광', '강두태'…와 같이, 어찌 보면 전혀 운동 선수 이름같이 들리진 않지만, 기가 막히게 그 분야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기도 하다.  순수히 필자의 '억지' 또는 '편견'쯤으로 받아 들여도 상관 없는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선수들의 이름을 관찰하다 보니, 이젠 신인 유망주의 이름을 들어도 '아, 얘는 될 이름 같다, 아니다..' 정도의 통밥이 나오기도 한다.  

박노준… 그의 이름만큼 특이하지만 결과적으로 막연하게나마 야구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 또 있을까?  혹자는 그 이름 석자를 들을 때면 '불운의 사나이', '만능 선수', '여우'..등 여러 가지 단어들이 연상 된다지만, 필자에겐 '박노준' 이란 곧 '고교 야구'를 의미했다.  우리나라 땅에 프로 야구가 태어 나기 전,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고등학교 야구… 박노준은 곧 고등학교 야구의 '축도' 이자 '마지막 황제' 였다.  '입추에 여지가 없는' 서울 운동장, 마분지로 만들어 진 줄무늬 햇빛 가리개 모자,  푸른색 하복의 '런닝 셔츠 응원단', 앙교 선수들의 경기 전 인사, 경기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1인 3역' 포지션 이동, 우승 팀의 헹가래, 그리고 패배자의 눈물… 이젠 '아득한 기억의 저편'이 되어 버린 우리 고교 야구를 상징하던 풍경들이다.  

'후추' 창간 이후,  야구 분야의 선수를 명예의 전당에 헌액 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많은 야구 팬들에게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후추는 창간 이전부터 꼭 한가지만은 고집하고 싶었다.  야구계의 제1호 헌액자만큼은 우리나라 야구의 '허리'와도 같았던 '70년대 고교 야구 출신'에서 한명을 선정한다는 계획이었다.  지금의 '이승엽', '정민태', '구대성'…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있게 해 준 그 우리 야구의 '뿌리'였던 고교 야구에서 말이다.  참으로 많은 이름과 얼굴들이 떠 올랐다.  70년대 한국 고교 야구 최고의 스타를 비롯해서 감독, 심판, 원로, 열성 학부형 까지… 하지만, 우리 야구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과 북한처럼 '프로와 아마츄어'로 두 동강이 나 버린 우리 야구의 '현주소'를 생각하자니, 과거에 비해 정말 보잘 것 없어져 버린 고교 야구의 마지막 자존심 역할을 해 준, 그리고 옛 명성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나마 프로와 아마츄어 야구의 끊어진 고리를 이어 주었던 '만능 선수' 박노준을 져버릴 수가 없었다.  

후추 '명예의 전당 - 박노준 편'에서는 가급적 박노준의 고교 시절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12년이란 긴 세월동안 그는 프로 유니폼을 입고 뛰었지만, 아무리 호의적인 시각으로 그를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프로 성적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의 그것에 비교가 되질 않기 때문이다.  누구 말대로 '턱도 없는 소리' 였다.  프로에 와서 그가 완전히 '죽을 쒔다.' 라고 하기 보다는, 박노준의 고교 시절 야구는 아름다웠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그의 고교 시절 트레이드 마크였던 '눌러 쓴 모자' 챙 사이로 삐져 나오던 매서운 눈빛,  짧지만 '우아했던' 보폭으로 내야를 뒤 흔들던 주루 플레이,  정교하고 날카로웠던 왼손 스윙, 실점 위기 때 마다 우측 외야에서 투수로 자리를 옮겨 자신감에 넘쳐 뛰어 나오던 그의 특급 릴리프 피칭…  박노준의 '아름다운 야구' 때문에 당시 꼬마 팬들은 한번쯤 스위치 히터 변신을 시도 했었고, 선동열 보다도 먼저 '18번' 이란 등번호에 힘을 실어 주었고, '선린 야구' 아니 '고교 야구'의 진미를 맛 볼 수 있었다.  상대 클린업 트리오를 연속 삼진으로 처리하건, 괴물 투수의 볼을 라이트 펜스 뒤로 넘겨 보내건… 그는 늘 한 표정, 한 동작이었다.  유난히 챙이 길어 보이던 그의 선린 상고 야구 모자를 꾸욱~ 눌러 쓰고, 반 정도밖에 보여 주지 않던 그의 검게 탄 포커 페이스,  그리고 오똑한 그의 콧날… 그야 말로 만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Cool 한 '고딩' 야구 선수였다, 박노준은…

그렇게 '펄펄 날던' 아마츄어 시절엔 그 어떤 명예의 전당에도 초대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았고, 명예로운 은퇴식을 고집 하기엔 너무 흡족치 못했던 프로 성적…  이런 경우엔 누가 어디서 박노준을 대접해 준단 말인가…?  정확히 18년 전, 그가 수 많은 팬들에게 제공 해 주었던 그 '잊지 못할 야구 순간들'에 대해선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  후추만은 꼭 하고 싶었다.  아직도 박노준의 이름 석자를 들으면 가슴이 뛰는 그런 팬들에겐 잊혀진 옛 기억을 되살려 주고, 박노준의 '전설'을 미처 모르고 자라 온 젊은 팬들에겐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던 '쌍방울의 박노준'의 모습이 아닌,  대한민국 고교 야구의 '마지막 황제' 박노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 주고 싶었다.  연봉 협상이니 해외 진출이 전부가 아니던 시절, '룸살롱 파티'가 아닌 '불고기 파티' 한번에 사력을 다 해서 뛰던 시절, 모교의 명예를 위해서 라면, '심장'을 내 쏟았던 고교 야구의 황금기를 회상하며 그 '아름다운 시절의 아름다운 야구인' 박노준을 불러 본다...


후추 REPLAY:  제 11회 봉황대기 고교 야구 대회 (1981년)

1981년 여름.  MBC 청룡도, 대우 로얄즈도 존재 하지 않던 시절…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제11회 봉황기는 어느 학교의 품으로..?'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룡기 또는 황금사자기 (각각 올해로 54회, 53회 째) 만큼 전통이나 역사는 짧지만, 지역 예선 없이 전국 고등학교 야구 팀 전체가 서울에 모여서 박 터지게 싸운다는 측면에서 볼 때, 봉황대기는 '한국의 고시엔' 이라 불릴 만큼 고교 야구의 '왕좌'를 판가름 내는 무대라고 볼 수 있었다.  

이미 대통령기는 이건열-백인호-조계현이 이끄는 군산상고로, 청룡기는 성준--류중일의 경북고의 품으로 넘겨 줬지만,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무관의 황제' 선린상고는 봉황기만큼은 넘겨 줄 수 없다는 심정으로 독을 뿜으며 '삼복 더위 8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 초반부터, 오명록의 경남고, 김정수의 진흥고, 한희민의 세광고를 각각 8-0, 4-2, 3-0으로 물리치는 막강 화력과 특급 피칭의 조화를 바탕으로, 선린상고는 일찌감치 4강 자리에서 적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세광고와의 8강전에선 '이 바오로' 라는 잊지 못할 이름의 투수의 역투로 김건우-박노준 계투 진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기도 했다.  한편,  특급 포수 서효인을 축으로 서울 팀의 자존심을 세우며  8강까지 올라 왔던 신일고는 청룡기 대회 우승팀 경북고 성준의 산발 3안타 완봉에 역시 3-0으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김영덕 감독이 이끌던 천안 북일고와 좌완 이현택의 부산상고가 나머지 2장의 '4강 티켓'을 차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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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 대 북일'…'경북 대 부산상고'가 격돌한 4강전은 많은 전문가의 예상과는 달리, 각각 5-0, 6-0이라는 선린과 경북의 일방적인 완봉승으로 끝났다.  고교 야구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던 선린의 선발 투수 김건우는 이 대회 4강까지의 등판 횟수 20이닝에 17 삼진, 3자책점, 방어율 1.35를 기록했고, 칼날 슬라이더와 슈트를 주 무기로 삼던 선린의 릴리프 전문 박노준은 16이닝에 14 삼진, 1 자책점, 방어율 0.56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자랑하며 선린의 결승 진출을 견인했다.  경북고의 좌완 투수 성준 역시,  20이닝 출전에 4삼진, 무실점 이라는 전형적인 '초고교급 투수의 괴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한 '방패'를 주무기로 삼던 양팀의 결승전을 놓고,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선린상고의 우세를 점 쳤다.  물론, 이미 한번 청룡기에서 선린상고를 잡은 경험이 있는 경북고의 전력이었지만,  선린상고가 두번 패 하진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선린상고에는 '공-수의 핵' 박노준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강-약 조절과 두뇌 피칭으로 경기 중반 이후에 '무실점 계투'를 책임져 왔던 박노준은 팀의 붙박이 3번 타자로서도 4강전 까지 5할2푼 이라는 경이적인 타율을 보여주며 '고교야구의 정점'으로 일컬어 지던 선수였다.

1981년 8월 25일 아침… 대망의 봉황대기 결승전을 앞 두고 특석 2.500원, 일반 1,000원, 그리고 학생표 500원을 받던 서울 운동장엔 뒤늦은 여름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교 야구 최고의 자리를 놓고 야구 명문 두 팀간의 '최고 승부'를 손꼽아 기다리던 당시 야구 팬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인 '안티 클라이막스(anti-climax)'가 발생한 것이었다.  하루 왠 종일 내리던 비로 인해 결승전은 다음날 26일로 연기 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20일 넘게 투혼을 발휘했던 양 팀 선수들은 피로한 몸을 달랠 수 있는 달콤한 휴식을 맛볼 수 있었다.  선린상고 선수들은 모처럼 귀가해서 가족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고, 지방에서 올라 온 경북고 선수들은 숙소인 '왕도여관'에서 '정신무장'을 다지고 있었다.

다음날 (8월26일) 벌어진 경북고와의 결승전… 후추 명예의 전당 헌액자 박노준의 호칭은 어쩌면 이 경기를 통해서 영영 바뀌게 된건 지도 모른다.  '고교 야구의 영웅'에서 '비운의 스타'로 말이다.  1회초 경북 공격, 무사 2, 3루의 결정적 위기를 삼진, 내야 범타로 처리한 선린의 선발 김건우의 호투를 계기로 선린은 1회말 반격에 나섰다.  1회말 박노준의 안타를 중심으로 1사 만루의 기회에서 후속 타자 조영일 (5번), 이경재 (6번)의 적시타로 먼저 3점을 선취하는 과정에서 박노준의 화려한 고교 야구 인생은  한 순간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정말  눈 깜짝 할 순간에 말이다.  2루에 있던 주자 박노준은 이경재의 좌전 적시타에 '무리'인줄 알면서도 힘차게 홈으로 대시 하였다.  선린의 탄탄한 투수력을 고려할 때, 초반 2득점과 3득점의 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홈플레이트 앞에서 '훅 슬라이딩'을 했는데 발이 맞지 않아 왼발이 완전하게 꼬였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그라운드의 흙 사정은 매끄러운 슬라이딩을 하기에 그리 이상적이지 못 했던 이유도 분명 있었다.  당시 박노준의 발목이 완전히 돌아 간 상태를 확연하게 포착해서 재방송, 또 재방송 해 주던 방송사가 매정하다고 생각 될 정도로, 그의 부상은 섬뜩한 광경이었다.  발목이 뒤 틀린 뒤에도 박노준은 엉금 엉금 기어서 홈플레이트에 도착, 선린의 석점 째를 챙겨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그의 고교 야구 신화도 그 순간 그렇게 쓰려졌다.

피칭, 타격, 그리고 주루 플레이… 어느 한 분야도 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박노준의 1회 퇴장은 '전력 차이' 그 이상의 '심리적 파멸'을 선린에 초래했고, '한국병원'으로 후송 된 박노준은 '그래도 3점 차'라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담담한 마음으로 병실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봉황 히어로' 성준을 상대로 6회까지 4-2란 점수로 리드를 지켜 나가던 선린상고는, 7회에 등판한 경북의 복병 잠수함 문병권 투수의 구위에 철저히 봉쇄 당했고, 8회초엔 결국 연속 된 실책으로 대량 실점을 하게 된다.  선린 2루수 김명배의 실책의 뒤를 이은 유격수 실책,  그리고 1루 악송구, 포수 조홍기의 3루 악송구로  2실점 해서 4-4 동점을 만들어 주었고, 이어 진 경북 타선의 연속 3안타와 희생 플라이로 2점을 추가, 승부를 6-4로 뒤집어 놓고 대망의 초록 봉황기는 대구로 향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3년을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숨 가쁘게 장식했던 박노준의 마지막 경기는 그렇게 비참하게 끝이 났다.  구수갑 감독이 이끄는 경북고에만 두번씩 무릎을 꿇으며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영광의 상처'는 왼발목 복사뼈 2개 골절과 3각 인대 파열이라는 무시 무시한 8주 진단과 함께… 박노준은 울었다.  수많은 야구 팬들도 울었다.  81년 전국대회 준우승만 세번을 하게 된 선린상고의 선수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조각난 박노준의 왼발을 쳐다보며 말이다.  

결승전을 제대로 뛰지도 못했던 박노준이 대회 '감투상'을 받은 사실보다도 더  박노준의 진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80년대 들어 와 처음으로 6년 만에  봉황기를 안게 된 전통의 명문 경북고 선수들이 우승이 결정 된 다음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경북고 동문회 사무실도, 야구협회 사무실도 아닌… 한국병원 209호실이었다.  그리곤 박노준에게 위로의 악수와 격려의 대화를 남기고 떠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박노준을 '적수'가 아닌 한국 야구의 내일을 같이 끌고 나갈 '최고의 동반자'로 인정 해 준 장면이었다.  바로 고교야구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선린 야구'

박노준은 어렸을 때 유난히 체력이 약했다.  초등학교 1학년을 두번이나 다닐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체력 보강'을 위해서 시작한 운동이 야구였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초등학교부터 서울의 용강 초등학교를 다녔다.  4학년 2학기 말부터 아버님의 권유로 용강 야구팀을 '따라 다니며 운동이나 좀 할 계획'이던 박노준은 그 후로 24년이나 글러브와 방망이를 쥐고 살게 되었다.  당시 포지션은 1루수와 투수를 맡고 있었다.  물론 왼손으로 치고 던지며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투수 쪽에 훨씬 더 소질을 보인 박노준은 선린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팀의 붙박이 좌완 투수로 활약을 한다.

그렇게 시작한 야구 덕분에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리틀 야구 극동지역 예선차 '괌'이라는 외국에 난생 처음 나가게 된다.  리틀 야구란 '학년 기준'으로 선수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기준'으로 선수들을 뽑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중학교 1학년 생 박노준이었지만, 그는 난생 처음으로 'Korea'란 마크를 달고 해외 무대에 서 보게 된다.  이 때, 박노준의 눈 부신 활약으로 당시 '리틀 야구의 거목' 이던 대만을 2-0 완봉승으로 물리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그리고 박노준이 진학한 곳이 선린 상업 고등학교…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선린상고 야구의 명성은 그 어느 야구 명문의 그것에도 밀리지 않았다.  영원한 경북고의 맹장이었던 고 서영무 감독이 잠시 이끌던 서울고등학교에게 비록 78년 봉황대기 결승에서 무릎을 꿇게 되지만,  그때부터 김문영, 이선웅, 윤석환, 류지홍..등의 쟁쟁한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과 박용진 감독의 조련술은 그 어느 팀과 맞붙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게끔 선린 야구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박노준-김건우와 같은 '선린 Farm System' 출신 1학년 선수들의 입학은 더욱 더 선린 야구의 미래를  밝게 해 주었다.

박노준이 고등학교에 입학 하자 마자, 그러니까 1979년 봄에 있었던 '사건'이야 말로 박노준이란 이름 석자를 국민들의 머리 속 깊숙이 입력시켜 주기에 충분했던 일이었다.  봉황기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가 '한국의 '고시엔' 이라면, 매년 5월에 열렸던 대통령기 고교야구 대회는 그해 고교 야구의 판도를 예상 캐 해 주던 '시즌 개막전'과도 같았다.  '드롭킥의 명수' 장영철 선수의 "프로 레슬링은 쑈" 폭로 사건 이후로,  프로 복싱과 고교야구 '투톱 체제'로 국내 스포츠 판을 주름잡던 시절의 '시즌 개막전' 이란, '겨울잠'을 자고 있던 야구 팬들의 맥박을 뛰게 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던 '빅카드' 중에 하나였다.

팀의 1번 타자와 1루수 겸 투수로 선발 출전했던 1년생 까까머리 박노준은 투-타에서 정말 눈부신 활약을 하며 평생 기억에 남는 신고식을 하게 된다.  당시 초고교급 투수로 전국 의 고등학교 타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부산상고의 윤학길 투수를 상대로, 15-1이라는 '비 결승전' 같은 점수 차로 물리치는 '선린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대회 MVP로 선정된다.   박노준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경험했던 '스타 탄생' 그 자체였다.

박노준이 확고부동한 주전 투수 겸 3번 타자로 뛰었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엔 선린상고가 명실공히 '고교 야구 2관왕'의 업적을 쌓는데 주역이 되기도 한다.  1980년 6월 23일 서울 운동장에서 벌어진 '돌풍의 주역' 박동수의 마산상고와의 청룡기 결승전에선 팀 선배 나성국 투수와 '합작'으로 5-0 완봉승을 만들어 내며 또 한번 '대회 최우수 선수'란 큰 상을 타게 된다.  당시 선린상고의 신임 구본호 감독은 결승전에서 위기 때 마다 우익수로 뛰던 박노준을 마운드로 불러 세워 마산상고 반격의 의지를 잠 재웠고, 이와 같은 전술을 경기 도중 4번씩이나 단행할 정도로 박노준에 대한 그의 신임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박노준은 매번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모교의 11년만의 청룡기 우승을 이끌어 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고교 야구의 마지막을 알리는 황금사자기 대회… 당시, 고등학교 최고참 선수들인 3학년 생들의 고별 무대이기도 했던 황금사자기 대회는 말 그대로 '최후의 승자'를 판가름 내는 자리였다.  대통령기 우승팀이자 대한민국 '국보 투수' 선동열이 버티던 광주일고, 청룡기 우승팀 선린상고, 화랑대기와  봉황기 우승팀이자 이상군이 이끌던 천안 북일고, 그리고 민관식 투수의 세광고, 이렇게 네팀이 4강에서 격돌했으니… 우승기의 향방을 자신 있게 점치는 전문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2학년 센세이션' 박노준, 김건우를 중심으로 한 선린상고는 세광고를 물리치고 결승전에 올라 당시 '천하무적'이라 불리던 선동열의 광주일고와 맞붙게 되었다.  '선린상고 대 광주일고'  이 두팀의 이름만 들어도 벌써부터 손에 땀을 쥐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필자의 사담을 곁들이려 한다.  필자와 '피를 나누다시피' 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 놈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둘이서 유난히도 야구를 좋아했고 '동네야구의 달인'이라 불릴 정도로 야구도 곧 잘 하던 녀석이었다.  그 친구에겐 '먼 외사촌' 뻘 되는 형이 한명  있었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도 언급을 했던 천안 북일고에서 3루수 겸 5-6번을 치던 '야구 선수 형'이었다.  바로 80년 황금사자기 대회 준결승에서 광주일고의 선동열과 대결했던 그 천안 북일고 소속 선수 '형'이었다.  선동렬 대 이상군… '정상인을 경기 들게 할 정도'로 긴박한 투수전으로 진행되던 준 결승전 경기 후반, 1점 차로 뒤지던 천안 북일고의 김영덕 감독은 바로 그 '친구 형'을 대타로 기용하면서 1루에 나가 있던 주자를 불러 들일 작전을 구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투 스트라익' 잡힐 때까지 선동렬의 볼에 손도 못 대고 헛 스윙만 해 대던 그 '형'이 몇번 파울 볼로 타이밍을 맞춰 나갔다.  친구 녀석과 같이 이 장면을 TV로 시청하던 필자는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과 같이, '제발 한방만..'을 속으로 외쳐 댔다.  그리곤 일이 터졌다.   선동렬의 투구를 말 그대로 '통타' 해서 3루타를 일궈 낸 것이었다.  경기는 동점이 되었고, 친구 녀석과 필자는 부둥켜 안고 '만세'를 불렀다.  그 친구 녀석은 '엉~엉~' 울어 댔다.  경기를 연장전까지 몰고 가게 했던 '회심의 3루타' 였지만, 천안 북일고는 결국 선동렬의 광주일고에게 백기를 들게 된다.  필자가 이런 극히 사적인 일화를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이유는, 바로 당시 선동렬 선수가 보여 주었던 고교 야구 판에서의 '압도적 지배 (domination)'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다.  필자의 친구가 흘린 그 감격의 눈물은 모름지기 '천안 북일고가 동점을 만들었다.' 라는 기쁨에서 라기 보다는, '선동렬의 볼을 쳤다.  그것도 우리 형이…' 라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 만큼 당시 선동렬의 볼을 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동렬의 광주일고가 한 게임이라도 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의 공은 정말로 무시 무시했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야구 팬들이 그 당시의 고교 야구를 사랑했던 이유도 아마도 이런 '아마츄어 야구의 의외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광주일고와 결승전에서 맞붙은 선린상고… '과연 선린의 저 어린 타자들이 선동렬의 볼을 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모든 이들의 관심 거리였고 승부의 관건이었다.  4타수 3안타 3득점 3타점 1홈런… 이게 바로 선린상고 3번 타자 박노준의 이날 기록이었다.  4 2/3이닝, 피안타 2, 사사구 3, 탈삼진 8, 실점1, 자책점 1…. 이게 바로 선린상고 릴리프 투수 박노준의 이날 기록이었다.  박노준은 날랐다.  1점 차 박빙의 승부를 이어가던 8회말,  타석에 나선 박노준의 쐐기포 2점 홈런은 한 걸음씩 반격 해 오던 광주일고의 등을 꺾어 놓았고, 5-3이란 스코어로 선린상고는 1980년 전국 대회 2관왕의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박노준이 쏘아 올린 투런 홈런은 다름 아닌 '괴물 투수' 선동렬로부터 얻어진 것이었다 …

2학년을 이렇게 '알차게' 장식한 '선린 야구'는 무서울 것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기세로 박노준의 3학년, 마지막 시즌을 맞게 된다.   야구 문외한이 보더라도 1981년 '선린 야구'의 전망은 밝았다.  팀의 주축 멤버였던 박노준-김건우의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고 봤을 때, 그들의 전국 대회 '독식 행진'엔 걸림돌이 없는 듯 싶었다.  '바뜨' (but) 그러나…군산상고의 '불의의 일격'으로 초반 탈락했던 대통령기 대회,  '그래 이제 정신 차리고 실력대로 한번 싸워보자' 라고 결심하고 나섰던 청룡기 대회에선 '천적' 경북고에게 12회 연장전 패 (5-6), 그리고 앞서 언급한 '운명의 봉황기 결승전'… 그렇게 '선린 야구'는 끝이 났고, '박노준의 고교 야구 전설'도 그쯤에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선린상고 팬이 아니었던 필자 (그렇다고 북일고 팬도 아니었지만)가 기억하는 '선린 야구'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이 기사를 쓰기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곤 세가지 정도로 요약 해 보았다.  첫째, 그들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신선했다.  고등학교 1-2학년 선수들이 팀의 핵심 멤버가 되어서 상대 팀 선배들을 요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박수를 안 칠 수가 없었다.  스포츠 팬 대부분의 심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약자 또는 다윗 옹호증' 때문 이었을까?  둘째, '선린야구'는 하모씨 표현대로 '짜임새 야구'와 '선이 굵은 야구'의 적절한 조화였다.  교타자들의 출루타와 현란하게 이어지는 주루 플레이, 그리고 중심 타선의 '싹쓸이 중거리 포'가 유난히도 잘 맞물려 있던 야구였다.  투수력에 있어선 '초장부터 박살을 내는 시원 시원한 피칭'을 선보였다.  타 팀과 같이 '부동의 에이스 1인 체제'가 아닌 '투톱 시스템' (김건우-박노준) 역시 색 다른 구조였다.  마지막으로, '선린 야구'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성원을 받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상 야릇하게 풍겨 나오는 그들만의 '외인구단 성' 팀 컬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이, 포지션, 타순을 다 떠나서, 그들에게선 승리를 향한 '하나 된 응집력'이 돋보였다.  우승 순간이 확인 되기 전까진 그 어떤 '오버 액션',  '세레머니' 또는 '함박 웃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무슨 '이기기 위해 모아 놓은 기계들' 같은 느낌마저 풍겼다. 그리고 그런 '선린 야구'의 이미지 메이킹에는 박노준의 '눌러 쓴 모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평생 서로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 해 왔지만 각자 다른 길을 걸어 오다가 결국 구치소 안에서 재회하는 두 친구, '태수' (최민수 역) 와 '우석' (박상원 역)의 '모래시계' 속의 대화 한 장면이 기억 난다.  '"그 다음이 문제라고.. 그 다음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고…"  그 어떤 스포츠 스타의 사진 중에서도 '선린 야구' 박노준의 발목이 돌아 간 그 한장의 사진만큼 한 선수의 인생을 신랄하고 간결하게 잘 나타내 주는 사진을 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박노준에게는 '그 다음'이 없었다.  박노준을 모셔오기 위해 연-고대의 과열 된 스카웃 파문도 있긴 했고, 선동열과 '쌍두마차 '를 이루며 고려대 전성기 시절을 구축하기도 했고, 82년 서울 국제 야구 대회에서 만세를 부르며 덕아웃을 뛰쳐나오던 '태극 전사' 중 한 사람이 되어 보기도 했고, 역대 타자 최고 계약금을 받고 프로 무대에서 뛰어 보기도 했지만… '선린 야구' 를 빛내던 '고교야구의 기린아' 박노준의 '그 다음' 야구 인생은 반쪽짜리에 불과 했다.


'반쪽짜리 인생의 서곡'

81년 10월. 부러진 발목도 어느 정도 아물어 가고, 박노준의 기구했던 고3 시절도 마지막 페이지에 달하게 된다.  우리나라 대학 스포츠의 '양대 산맥'인 연세대와 고려대, 고려대와 연세대의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스카우트 전쟁'은 극에 달하게 되지만, '고3 최대어' 박노준의 행보는 안암골 '호랑이 굴'로 향한다.  '천적' 경북고의 최무영, 서울의 라이벌 신일고의 민경삼, 서효인과 함께 말이다.  반면, 연세대는 진흥고의 좌완 에이스 김정수, 부산고의 대형 포수 김성현, 박노준의 선린 동료  이경재를 확보하는데 만족해야 했고, 박노준의 '10년 지기' 김건우와 '선린 킬러' 성준은 한양대에서 다시 만난다.  

박노준이 고려대에 입학하던 82년… 우리 나라 야구계엔 '프로 야구 출범' 이란 새로운 반환점을 맞이하면서 야구 팬들의 관심사는 한 순간에 '프로'로 이동한다.  동시에 '고교 야구의 종말' 이란 뼈 아픈 행정 착오도 초래하면서 말이다.  그해 가을,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서울 국제 야구 대회를 겨냥한 어우홍 감독의 국가 대표 야구팀에는 몇 안 되는 대학 선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박노준이었다.  간간이 대타 겸 릴리프 투수로 경기에 나가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상대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출 하기까지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대회에서 박노준이 얻은 것은 '군 면제'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실, 그 이상을 기대 하는 것도 대표팀 막내둥이 박노준에게는 무리한 요구였겠지만 말이다.

군 복무 문제를 깔끔히 해결한 박노준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1인 다역'의 임무를 계속 한다.  봄, 가을에는 고려대 경기에 출장했고, 여름, 겨울에는 대표팀 훈련 및 대회에 참가 하면서…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대륙간 컵 야구 대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 그리고 84년 LA 올림픽 시범 경기..등, 굵직한 국제 대회에는 변함없이 선발되었고, 누구보다도 제 임무에 충실 하였다.  '임무 충실'… 어쩌면 이 말 하나 때문에 박노준의 야구 인생은 '반쪽'으로 끝이 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고려 대학 시절 4년 동안 박노준은 던지고 또 던졌다.  '대학시절 박노준만큼 안 던진 에이스 투수가 몇이나 되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박노준은 던지지 않는 날엔 타석을 빛내야 했고, 투수들 쉴 때는 '펑고'를 받아야 했다.  그 당시 박노준만큼 많은 경기를 뛴 대학 스타는 분명히 없었다.  국가대표 경기를 제외한 4년 간의 고려대 통산 기록을 정리 해 봤다.

피   칭

타   격

년도

게임

승패

방어율

82

7

2패

3.00

83

15

5승2패

1.07

84

24

9승1패

2.36

85

18

4승5패

3.25

게임

홈런

타점

타율

33

0

10

0.236

12

0

3

0.225

26

2

19

0.310

25

7

20

0.319

이닝 수로 따지자면 박노준의 3,4학년 출장 이닝 수는 각각 103.3 이닝과 61.3 이닝에 속한다.  대학 투수 중 2년 통산 최다 이닝 수 였다. 4학년 선배 선동열의 팔꿈치 부상으로 생긴 고대 마운드의 공백은 3학년 박노준의 독차지였고, 워낙 가슴이 약했던 고 최남수 전 고대 감독의 '박노준 의존증'으로 말미암아 약체 서울대와의 경기에까지 출장을 시키게 했다 (후추 노컷 인터뷰 참조). 결국 무리한 연투로 인해 대학 4학년이 되던 85년 7월, 박노준은 생애 두번째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팔꿈치 및 어깨 고장'으로… 서서히, 아주 서서히 고등학교 시절의 '쌩쌩하던' 박노준의 팔은 망가져 가는 것이었다.


'만신창이 12년'

박노준은 회고한다.  타자 또는 투수로만 프로 무대에서 뛰었더라면 국내 프로 야구 기록 하나쯤은 달성하고 은퇴 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그 말을 믿는다...  

박노준이 '프로 진출이냐? 실업 행이냐?'을 놓고 고민 하던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프로 야구 팀의 무지한 '스카우팅 (Scouting)'작업에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선린중학 1학년 때부터 줄기차게 '혹사' 당해 온 박노준의 팔을 믿고 당시 MBC와 OB 간의 영입 작전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물론 지명도 면에서 그 만한 '대어'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박노준을 1순위 지명에서 놓친 팀을 위해서 '2명 연속 지명'이라는 편법까지 도입되는 코메디를 연출 하기도 했다.  결국 OB가 박노준을 지명하게 되고 MBC는 김건우, 이재홍, 민경삼, 서효인…등 역대 최강의 '루키 진'을 확보하게 된다.  그 후로도 박노준은 7번에 걸친 연봉 협상 결렬로 인해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프로 생활을 예견하게 해주었다. 85년 12월 말일까지 연봉 및 계약금이 구단과 합의 되지 않는다면, 몇 가지 시나리오가 박노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 진출을 깨끗이 포기하고 88년도 까지 아마 (실업)에 남아 있다가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여 명예로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야구계를 떠난다는 시나리오 하나와 '군 복무' 였다.  82년 '한대화의 한방'으로 군 면제 혜택을 받은 박노준은 관계 당국이 병역특례자의 프로 진출 허용 기간을85년 말로 못 박아 놓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불 보듯 뻔한 결과를 놓고 양자 간에 소모전을 계속 하던 것이었다.  12월 30일 에 결국 계약금 5,000만원 (역대 타자 최고 대우), 연봉 1,200만원 (신인 연봉 상한선)에 합의하고 박노준은 OB에 입단하게 되지만, 'OB 행'으로 말미암아 박노준의 프로 인생 12년은 전혀 그가 뜻하지 않던 '길'을 걷게 된다.  

박노준의 OB 입단 동기 중 서울고 출신 좌완 투수 박형렬 선수를 제외하곤 마땅한 투수가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당시 OB 감독 김성근 씨는 '비록 드래프트 당시에는 투수 박노준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팀 사정 상 어쩔 수 없이 다시 투-타 겸업을 시키기로 했다' 라는 결정을 내린다.  참, 요즘 프로 선수들이 들으면 '칼 들고 설칠 일'이 아닐 수 없다.  메이저 또는 일본 프로 야구에도 보기 드문 '투타- 겸업', 일찍이 국내 실업 무대에선 고 임신근 전 해태 코치가 한번 시도해서 타자로서도 각광을 받을 일이 있지만, 100경기 넘는 프로 야구의 장기 레이스에서 '투-타 겸업' 이라는 개념은 '선수 조지기로 작정한 사람의 발상'이라고 밖에 판단되지 않는다. 대학 4년 동안 무리수를 띄워 가며 하루 하루를 노동해야 했던 '1인2역'의 박노준… 프로에 와서도 똑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 선수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운명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펼쳐진 1986년 프로 야구 시즌… 81년 고교 야구 판을 뒤 흔들던 박노준과 김건우, 그리고 성준…등의 '고교 스타'들이 다시 한번 팬들의 '스포트 라이트' 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벼 주었던 그 한해 성적을 놓고 보자면… 박노준은 '판정패'를 면하지 못했다.  인기도나 지명도로 보았을때 '만년 2인자'축에 속해 있었던 김건우 선수가 'MBC의 희망'으로 우뚝 솟아 오르면서 그해  신인왕을 거머쥐었고 (18승6패 - 방어율 1.80), 성준 선수는 '제2의 김일융' 이란 소리를 들으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15승5패2세 - 방어율 2.36).  '투-타 겸업'을 시도했던 박노준은 성적은 5승6패7세이브 (방어율 2.28)로  신인치곤 극히 희망적인 성적을 냈지만, 나머지 두 라이벌의 성과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그 뒤 1년간 더 '두집 살림'을 꾸려 나갔던 박노준이었지만, 예전의 화려한 결과는 꿈도 꿀 수 없었고, 타격마저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88년 스프링 트레이닝 당시, 박노준은 타자로서 '외길 인생'을 선언하고 피나는 훈련을 거듭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던 팀의 에이스 박철순 선수의 '아킬레스 건 파열'로 인해 또 다시 '투-타 겸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 가지 분야에서도 국내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가 '하늘의 별 따기' 이상으로 힘든 판국에, 팀의 사정에 따라 '이것도 찔끔, 저것도 찔끔' 한다는 것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하기 까지 정확히 '3년의 방황', 그리고 이광환 이라는 새로운 감독 영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박노준의 방황은 통산 전적 5승7패7세 - 방어율 3,25 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끝이 나는가 싶었다.

박노준은 항상 투수이길 원했다.  그가 투수의 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후추 노컷 인터뷰'에서 본인에게 직접 들어 보기로 하고, '전업 타자'로 변신한 박노준의 '화려한 부활'을 가로 막은 두번째 요인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을 지에 대해선 본인 자신도 몰랐다.  바로 '부상' 이었다.  아… 박노준에겐 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단어인가?  필자가 박노준의 야구 인생을 '반쪽'이라 결론 지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처럼 투수와 타자란 두 분야에서 모두 특출한 성적을 내지 못 해서가 아니라, 그의 야구 인생은 '아마츄어'에서 끝이 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니, '프로 야구' 라는 좀 더 가능성 있고 빛나는 무대에서는 그의 '무지막지'했던 잠재력을 '반' 밖에 보여주지 못 하고 글러브와 방망이를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프로 야구 선수 박노준'은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본인도 주위의 이런 평가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어떠한 잣대로 평가한다손 치더라도 프로 선수로 그가 뛰었던 12년은 '그저 그런 성적' 뿐이었다.  특히, 선린 야구 시절의 그의 명성에 비하면 더 더욱이 그렇다… 한 '영웅의 몰락'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 '천하의 박노준'의 야구 인생을 망하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한가지도 잘 하기 어려운 프로 무대에서 두가지를 잘 하겠다는 욕심부터가 문제였고, 또 그래 주기를 요구했던 구단 환경이 그의 프로 초창기를 망쳤다고 본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바로 '이골'이 나도록 찾아 드는 '부상의 악령'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부상을 '관리' 하지 못한 그 첫번째 책임은 바로 박노준 자신에게 있다.  이 점만은 그 누구도 절대 부인할 수 없다.  '프로 선수의 몸'은 '돈'이라고 한다.  그는 '돈 관리'를 잘못한 낙오자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박노준과 같은 경우를 놓고, '선수 혹사' vs. ' 자기 관리 실패' 란 논쟁을 밤 세워가며 펼칠 수 있는 것이 우리 야구의 현실이다.

87년 어깨 부상 재발, 88년 손등 뼈 골절, 89년 손 가락 뼈 골절, 92년 왼쪽 무릎 부상, 93년 갈비 뼈 부상, 94년 허벅지 근육 파열, 96년 무릎 십자 인대 파열… 박노준의 '부상 일지'다.  뭐가 하나 부러지고 파열 될 때 마다 '그해 장사는 땡 쳤다' 라고 볼 때, 박노준의 프로 야구 인생은 시작도 제대로 해 보지도 못 하고 끝나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운동 선수들은 '혹사' 라는 '재앙'에 시달리고 있다.  프로 야구가 출범한지 20년이 가까워 진 오늘날에도, 아니 '고교 야구의 황제' 박노준을 그렇게 떠나 보낸 지 몇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말이다.  

91년 12월 2일, 박노준은 해태의 이광우와 전격 트레이드 된다.  그리고 1년 뒤, 이번엔 백인호와 함께 쌍방울로 현금에 팔려 간다.  이 때만 하더라도 이미 필자의 마음 속에 '박노준'이란 이름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전형적인 '못 다 핀 꽃 한송이'로 기억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더 큰 관심을 쏟을 '용기'가 없었다.  더 이상 추락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관심을 '끄려고' 했다.  그러다가 96년 어느 여름 날, 텅 빈 쌍방울의 전주 구장에서 홈런을 쏘아 올리고 고개를 깊이 파 묻은 채  절룩 거리며 베이스를 돌던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쫄딱 망한 쌍방울 팀의 재정난으로 인하여 선수 층도 두텁지 못했고, 무릎 십자 인대가 끊어져도 쉴 수가 없었던 그런 암울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 하던 박노준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곤 15년 전, 광주일고 선동열의 슬라이더를 통타 해서 우측 펜스를 넘긴 후 온 국민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다이아몬드를 돌던 그의 모습이 떠 올랐다.  '아름다운 시절의 아름다운 야구인' 박노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프로 통산 2할6푼2리, 28 홈런, 288 타점, 141 도루 란 기록을 남기고 그는 '반쪽짜리 야구 인생'을 마감했다.


나머지 반쪽을 찾아서…

필자가 잠시 홍콩에서 생활할 때, 우연히 인터넷 신문에서 박노준의 근황을 들었다.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마이너 리그 팀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고.  물론 대부분의 국내 은퇴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자비를 톨톨 털어서 짐 싸 들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LG의 김용수 선수가 프로 야구 선수 최초로 '영구 결번식'을 갖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곤... 박노준 선수의 은퇴 모습은 어떠했을까..하고 생각 했다.  박노준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대 스타들도 헌 신짝 내다 버리듯 낮 뜨겁게 내쫓는 그런 더러운 우리 야구 풍토에서 '보잘 것 없는' 박노준의 은퇴식을 해줬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박노준의 '반쪽자리 야구 인생'에 대해선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고, 제일 아쉬워 한다.  '후추'고 나발이고 본인만큼 가슴 아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아니, 그 못 채운 '반쪽'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예쁜 두 딸 '혜연'과 '혜상'을 뒤로하고 미국 땅으로 향한 것이다.  97년을 끝으로 국내 리그에서 은퇴 한 후, 그는 캐나다에 짐을 풀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마이너 리그 팀 '세인트 카타린' 이라는 팀에서 작전 코치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올해 초, 그는 다시 뉴욕 메츠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작전 및 주루 코치 공부를 했다.  그리고 지난 9월 말 서울로 돌아 왔다.  그가 지난 2년 간 '큰 물'에서 보고 배운 것은 너무나 소중한 교육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뭘 그리도 잘 가르치나? 에 대한 터득보다도, '우리가 뭘 그리 잘못 가르치고 있나?'에 대한 공부가 더 값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참 할 말이 많았다 (후추 노컷 인터뷰 참조).

그리곤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제2의 박노준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요즘 그는 또 한번 자비를 털어 전국을 돌며 '무료 야구 클리닉' (문의: 02-544-1231)을 실시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박노준처럼 고교 야구를 점령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부상을 방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다음'을 찾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우리 야구의 새싹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 말이다.  

[특별부록] '박노준 무료 야구 클리닉' 탐방기도무지 '박노준은 어떤 지도자의 모습으로 제자 (?) 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가 제일 궁금했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12월6일 오전 도봉역 근처에 위치한 성균관 대학교 야구장을 찾았다.  야구장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박노준의 모습이나 운동복 차림의 학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1시간 넘게, 그것도 월요일 아침부터 이 먼곳을 찾아 왔는데.. 이거 망하는 분위기…??'  하는 수 없이 옆에 있는 성대 체육부 숙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한분을 붙잡고 야구 교실에 대한 문의를 드렸더니, '따라 오쇼…' 하면서 필자를 숙소 내 식당으로 안내했다.  이미 그곳엔 2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래, 이론 교육부터 하겠지…' 그제서야 필자의 아둔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올 시즌 몸 담았던 뉴욕 메츠 팀의 점퍼를 걸쳐 입고 운동복 바지에, 흰 운동화를 착용한 박노준… TV 화면을 가리키며 무언가 높지 않은 목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바로 뉴욕 메츠의 트레이닝 / 재활 담당 '닥터'가 만든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기법 ' 비디오물을 보면서 하나씩 설명 해 주고 있었다.  2시간 이상 되는 이 비디오 자료를 보면서 박노준이 거듭하는 말은 "한 동작을 하더라도 '정 자세'로, 지겹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야구 선수들이 쓰는 근육을 부위 별로 강화 시켜주는 훌륭한 데모 테이프 같았다.  같은 어깨 부위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정말 '힘줄' 까지 강화 시켜줄 것 같은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간간이 뉴욕 메츠의 선수들도 '찬조 출연' 해서, 비디오 물의 재미를 덧붙여 주었고, 메츠의 주전 유격수인 '레이 오르됴네즈' 선수가 나왔을 때 박 코치는 재미있는 '여담'도 풀어 놓았다.  "이 선수가 쿠바에서 망명한 선수인데, 워낙 선수들 감시가 심하니까 얘가 택한 망명 수단은… 미국에서 열렸던 미국 대 쿠바 야구 시합 중, 공-수 교대 할 때, 서서히 유격수 위치로 뛰어 나가더니 갑자기 유격수 위치에서부터 좌익수 뒤 펜스까지 전력 질주 해서, 담을 뛰어 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곤 펜스를 뛰어 넘자마자 '나 망명한다!!' 라고 외쳤대요.  유격수 자리에서부터 그 펜스까지의 거리를 뛰어 갈 때는 10년보다도 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오전 강의를 마친 '학생'들 (신일고 및 성균관대 야구부원, 그리고 일반 코치들)은 간단히 근처 '청요리집'에서 자장면을 한 그릇씩 비우고 오후 강좌에 들어갔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인 야외 교육… 먼저 베이스 러닝, 번트, 타격…등, 철저히 '기본기 위주의 커리큘럼'을 준비하고 있었다.  베이스 러닝 교육 같은 경우는,  너무 기초적이라서 지겨운 정도는 아니지만, 선수들이 금방 잊어 버리기 쉬운 포인트들을 집중적으로 설명 해 주었다.  예를 들어, 안타치고 나가서 1루 베이스를 돌 때 밟아야 하는 베이스 모서리 위치,  주자가 1루에서 리드하는 방법, 부상 방지 슬라이딩 요령…등.  어쩌면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수 없이 반복하는 기본기 교육 지침을 그대로 옮겨 다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노트북 안에는 크고 작은 그림과 교육지침 내용이 빽빽히 자리 잡고 있었다.

3-4시간을 같이 했던 '박노준 무료 야구 클리닉'을 참관하면서,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박노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기타 기업이 주관하는 야구 교실처럼 요란하게 홍보도 못했지만,  야구를 좋아하고 박노준을 기억하는 '소수정예' 그룹을 모아 놓고 열심히 가르치는 박노준을 보면서 그의 '반쪽'이 서서히 채워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일도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할 겁니다.  사람이 많이 안 모여도 상관 없습니다.  단1명만 나와도 할 겁니다."  필자의 가슴은 따뜻해 지고 있었다.  박노준의 씩씩한 '부활'을 바라 보면서,  그리고 그의 말을 일일이 노트하며 경청하던 어린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후추 노컷 인터뷰

박노준의 핸드폰 번호를 어렵게 구해낸 필자는 정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노준이 아닐 것이라고 혼돈할 정도로 무척이나 부드럽고 세련된 그의 목소리에 일단 한번 충격을 받았다.  그의 전화 받는 매너는 처음부터 워낙 사무적이고 빈틈 없어서 이런 저런 취재의 배경 설명할 여유도 없이  약속 장소와 시간만 정하고 끊었다.  그래도 순순히 인터뷰에 응해 준 것만으로 위안을 하면서 말이다.  목동에 거주하고 있는 그를 만나기로 한 지난 2일… 필자는 마치 '옛 스승을 만나러 가는 제자'의 들뜬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였던 국민은행 앞 건널목 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박노준의 모습을 보면서 두번째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라곤 앞 머리 사이 사이에 자리 잡은 약간의 흰 머리 정도?  어느덧 40줄을 바라보는 박노준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나서 잠시 동안 그간 '후추'의 취재 활동과 창간 취지, 그리고 명예의 전당의 목적..등을 설명 받은 후에야 그의 표정이 좀 부드러워 졌다.  "아이고… 저 보다 더 훌륭한 선배들이 많은데..' 하며 겸연쩍어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지난번 전화 통화 할 때, 박노준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취재를 하고 싶다는 필자의 요구를 '그건 곤란합니다.' 라고 단칼에 짤라 버린 이유도 자연스레 설명 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아파트 내부 공사 중이라서 앉아 있을 자리도 마땅치 않다고 했다.  "한 30분 정도 밖에 시간이 없다." 라고 하던 그의 첫 대답과는 달리, 2시간 가까이 많은 얘기를 정말 즐겁게 했다.  필자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는 점 중에 하나는, 이런 지나간 스타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잃어 버린 시간'을 잠시나마 돌려 주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박노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린상고 시절' 얘기를 하면서 그는 특유의 왼손 스윙도 연출 하기도 하고, 피칭 와인드 업도 재현해 가면서 잔잔하지만 활기 찬 자세로 인터뷰에 임해 주었다.  다음은 후추 명예의 전당 제 7호 헌액자 - 박노준과의 'No Cut 인터뷰' 전문 이다.

이런얘기 저런예기

 가족 분들이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세요? 

  형제보다도 가족. 와이프하고 4학년, 1학년 딸만 둘 있어요. 11살, 8살

 사모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어~ 전 윤 주.

  몇 년도에 결혼 하셨어요?

 87년. 87년

 따님들 이름 좀…

 혜연, 혜상. 은혜 혜자…

 이렇게 뵈니까 운동하신 분 같지가 않아요.

 왜요? 하하하.

 어쩜 그렇게 정말… 아주 차분하시고…

 아유 그렇지 않아요. 뭐, 요즘 은퇴 한지 2년 되니까 좀 여유가 있어요.

 술 많이 하세요?

 술 안 해요.

 원래 안 하세요?

 안 맞아서 안 해요. 분위기 맞출 수는 있어요. 기본체력이 있어 가지고 밤새도록 마시면 마실 수는 있어요. 즐겨 마시거나 일부러 사서 마시고 그러진 않아요.

 고향이 어디세요?

  전남이요. 전남 목포요.

 국민학교는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서울 봉천초등학교요.

 t선천적으로 왼손이셨어요?

 예

 식사도 왼손으로 하십니까?

 아~  가위질하고 공만 왼손으로 던지고, 나머진 전부 다 오른손이예요. 골프도 왼손으로 하고.

 골프도 왼손으로 하십니까? 잘 치세요?

 그거를 타자동안 치면은… 선수 때 치면, 욕먹으니까 안쳤는데 코치나 감독되면 쳐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초에 플로리다 가 가지고 처음 시작했어요. 들어가면 코치들이 틈만 나면 골프 치러 가자고 그러고 문만 열고 가면 골프장이니까… 작년 올해 많이 쳤어요.

 왼손으로요?

 왼손으로 쳐요. 골프가 이게 오른손 위주로 이… 골프클럽이… 또 … 필드가… 그래서 왼손이 좀 불리한데 제가 뭐 선수할거 아니고… 왼손으로 칩니다.  

  스윙은 그대로 시겠네요.

 뭐 골프스윙하고 야구스윙하고… 똑같지는 않지만 많이 비슷하죠.

 그런데 이렇게 뵈니까 외람된 말씀인데… 코는 여전하시네요.

 오우, 예… 하하.

  젊으셨을 때 그 약간 '매부리 코'랑 똑같으시네요.

 하하


옛날 이야기

 어렸을 때 야구하시면서 굉장히 좋아하는 선수나 '우상'이 있었나요?

 그때 당시는 TV나 이런 걸로, 뭐 아마야구 활성화가 그렇게 되질 않아가지고 좋아하는 선수… 없었고, 일본의 장훈 선수가 있었어요. 잘할 때니까 신문에도 많이 나고, 방송에도 많이 나고,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장훈 선수를 굉장히 존경해왔어요. 나중에 만나는 영광도 겪었고.

 언제 만나셨어요?

 제일 먼저 만난 것이 81년 12월달 롯데호텔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다리 다쳐 가지고 퇴원하고 나와 가지고 롯데호텔에서 TV 방송국에서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그때 처음 만났고 그 후로 어~  93년? 93년도에 장훈씨가 전주에 왔어요 쌍방울 팀에 와 가지고 한 1주일간 김기태 선수와 같이 지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많이 배웠어요.

 아 그랬어요?    그럼 아마시절이나 프로에 오셔 가지고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님이나  지도자 분 계세요? 워낙 많으셨잖아요?

 많았죠. 제일 그래도 인정해주고 그나마 좀 기술적으로도 많이 이렇게 조언해주신 분이 이광환 LG감독이었죠. 일본1년, 미국 1년 공부하시고 오셔 가지고 OB 감독으로 들어 왔는데 그때 좀 많이 배웠어요. 그때 이제 난 투수하다가 어깨를 다쳐 가지고 방망이로 돌 그런 기로에 섰을 때, 과감하게 그때 당시의 오비 베어스 센터필더 박종훈 선배라고 있는데 그 선배를 밀어내고.. 아주 방망이를 잘 치고 그랬었는데, 저를 갖다가 그 자리에 딱 박더라고요.

 신인왕 출신이시잖아요.

  박종훈선배 그 바람에 은퇴했어요.^^ 그 후로 이제 10여년간, 딱 10년간 뛰었는데… 자기 알아주는 사람이 제일 기억에 남죠. 그때 그렇게 안….. 주전으로 붙박이를 안 시켜줬으면 그렇게, 오래 못 했을 수도…. 못 했을 거에요. 또, 일본1년, 미국 1년 역시 공부하고 오신 분이라 마인드가 틀리고 가르치는 방식이나.. 이제는 저도 작년, 올해 2년 갔다 왔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선수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지도자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게 먹혔고, 이제는 제가 현역할 때 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세대가 바뀌면서 위에서 누르려고 하면 선수들이 안받아들여요. 예, 역효과가 나요. 그러니까 선배 입장에서 신인들이 들어왔을 때 옛날에는 쥐어박고 그러지 않고 살살 다독거려줬더니 더 잘하더라고요. 말도 잘 듣고. 어, 예의도 바르고. 그런데 옆에서 이렇게 막 누르려는 선배들한테는 그렇게 안하더라고요. 아, 내가 지도자가 되면 어떤 식으로 해야겠다는 걸 그때 느꼈고, 또 이번에 가서 2년 있으면서 걔네들이 애들을 가르칠 때, 가르치는 걸 보니까 감독, 코치는 위에서 군림하거나 이끌어가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선수들이 잘 운동하고, 게임하고 할 수 있게끔 장판 깔아주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Support. 도와주는 거죠. 그러니까 선수들이 존경하고 친구처럼 해도 많이 자문을 하고, 자문해주는 거에 대답을 해주고 아주 신뢰하고 기술 이전도 잘 되고… 우리는 아직까지도 요번에 와서 보니까 아직까지도 앞에서는 하라고 하니까 하죠.  "네" 하고, 돌아서면 욕을 하니까.  그건 굉장히 서글픈 거에요. 그래서, 그런 것… 그런 것 자체부터 해 가지고 획기적인 그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이광환 감독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존경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리틀 야구도 하셨죠 ? 그때는 국민학교 때 하셨습니까 ? 중학교 때, 선린 중학교때 대만에도 한 번 갔다 오셨다고… 일본인가 ?

 괌. 초등학교, 그때… 원래 그게 나이 제한해 가지고 가는데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제가 나이가 해당이 되가지고 리틀야구에 선발이 됐어요. 선발이 되가지고 괌에서 극동지역 아시아 예선전을 해요. 미국에 가서 하는 월드시리즈 리틀야구 예선전을 하는데 일본, 대만, 괌, 필리핀, 우리, 태국인가?… 그래 가지고 하는데 그때 76년도까지.. 70년대 초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대만이 한 번도 아시아지역이고, 월드 참피온 시리즈고 진 적이 없었는데 그때 저희가 처음 이겼어요.

 2-0으로 완봉승 했다고…

 -0 완봉승인데, 그때 전 중학교 6개월정도 뒤에 먼거리 마운드를 던지다가 초등학교 거리에서 다시 던지라 그러니까 포수가 못 잡어요.  포수가 초등학교 6학년 짜린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못 잡아요. 변화구를 전혀 못 잡고, 직구만 던지는 데도 못 잡아요. 가서 "너 글러브만 대고만 있어라. 대고만 있어라." 그때 걔들이, 대만 애들이 우리보다 머리가 하나씩 다 컸어요. 그 전까지, 그 전에까지 뭐12-0, 15-0 막 이랬대요. 치면 넘어가고. 근데 한국에서 그때 "데리고 가자." 해 가지고 절 데려가서… 근데 그걸 2-0으로 이겨 가지고 대만이 발칵 뒤집혔대요.

 그래서 그때 대만, 그 후로도 전지훈련 가고 그러시면 박코치님 알아보고 그런 분이 있다고 그러던데요…

 대만 이름으로 제 발음이 '부르진'이 나와요. 그래 가지고 대만만 가면, 그 후로 대만을 대표단 게임, 캠프 이것저것 해 가지고 13번을 갔는데 갈 때마다 거기 야구인들은 환영을 해 줬어요.

 어릴 때 꿈은 원래 야구선수였어요 ? 아니면 ?

 어렸을 때 꿈은 정치를 하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정치를 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정치에 관심이 많고. 예, 그런데 이렇게 됐지만은 앞으로는 내가 그때 그러고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지나면서 비즈니스를 해야 되겠다. 사업을 해야 되겠다. 남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든, 뭘 하든 그런 게 굉장히 관심 있고 재밌겠더라고요. 나름대로. 학교도 고대 들어갈 때도 다른 사람들은 체대, 물론 뭐 경영학과나 법대 간 사람도 있긴 하지만 체대가면 아무래도 교사 자격증도 나오고 학점 따기도 쉽고 그렇거든요, 아무래도. 다 그런데, 전 경영학과를 갔지요. 그래서 고생 많이 했어요. 학점 딴다고. 유급 될 뻔도 하고 그랬는데. 교수들 찾아다니고 사정하고 빌고. 조교들 꼬셔서  답도 좀 알아내고.. ^^ 그렇게 해 가지고 간신히 졸업을 했죠. 경영학과, 어렵게 땄어요. 고생한 만큼 보람도 있고 친구들이, 에, 어른들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라고 그래 가지고 법대, 경영대 애들 많이 사귀었죠. 변호사, 검사, 사업하는 친구들 많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요. 네. 지금 현재 실정이 어떻고 나라가 어떻고 앞으로 하려는 아이템, 장사할 게 뭐가 있고 그런게 자산이죠. 언젠가는 그러면 운동을 하면서도, 왜냐면 돈이 없으면 소신껏 지도자 생활도 못해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다음에 해야 되겠다.' 외도한다는 것이 아니고…..

 예전에 부모님들은, 선친께서 직업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

 아, 저희 부친께서는 전형적인 그, 회사원.. 직장인.

 아버님께서 야구하는데 반대는 안하셨습니까 ?

 아이, 안하셨어요. 저희 어머님은 반대를 좀 했어요. 괄괄하셨어요, 어머님이. 활동적이셔서 부동산을 하셨어요. 지금도 부동산 중개업 그걸 하고 계시고,  봉천동 서울대학교 후문, 관악산 쪽에 땅 정지작업 다 해 가지고 집 다 지어서 팔고 지어서 팔고해서… 이런 거...


선린야구

 선린상고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볼께요. 선린 야구 스타일을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 ? 선린 야구의 팀컬러를. 당시 뛰실 때.

 전통이란 무시 못해요. 네. 전통, 한마디로 역시 전통 있는 야구는 야구, 농구면 농구 전통 있는 학교 가서 졸업을 하고 연결이 되는 것을 보면 현역 때 학교 있을 때는 전통 있는 학교 같으면은 다른 학교에서는 없는 그런 게 있어요. 그 학교 특유의 팀 칼라 라든지, 끈끈하게 물고 늘어지는 거라든지 타격이라든지, 팀웍이라든지… 이런 게 있는데 선린상고는 굉장히 군기가 셌었어요. 하루도 안 맞고 교문을 나가는 적이 없었어요.

 그때 감독님이 구본호 감독님이셨죠 ?

 선린 중학교, 선린상고가 무지하게 빠따가 셌어요. 군기가, 군기도 군기지만 규율이 엄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했어요, 진짜.

 그런 건 저희는 어렸으니까 상상도 못했어요

 예. 선배들도 올라오면 무서웠고 대신에 뭐가 좋았냐면, 전통 있는 학교기 때문에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이 될 거 아닙니까. 선배들이, 선배들이 틈 날 때마다 올라와서 지도도 해주고 타자도, 투수도 그렇고요. 그게 강팀이더라구요. 예. 그리고 그냥 예를 들어서 방과후에 운동하고 저녁에 운동 마치고 밥먹고 비닐하우스에서 좀 하고 가는 것이 아니고, 12시 될 때까지 뭐 개인적으로 경쟁심을 유발 해 가지고 개인운동을 그렇게…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은 다 본단 말 이에요. 그러면 다같이 열심히 한단 말에요. 그래서 팀 전체전력이 올라가고 좋은 성적을 내게 되고 또 밤 늦도록 까지 타이어 두들기고 연습하고 늦으면 학교.. 버스 끊기면은, 끊기면은… 학교근처에서 하숙하고 있는 친구들이나 학교 숙소나 이런데서 자고 또 아침에 새벽에 또 운동하고 그런게, 네…

 다른 이유가 없었네요. 워낙 딴 거 없이 훈련 열심히 했으니…

 훈련. 진짜 훈련량이 많았어요. 왜냐 하면 지금 이제 내가 애들한테 가르치는 입장이 되가지고 얘기할 때 꼭 얘기해주고 싶은 것이, 고 3때, 그 때까지는 아무리 운동 훈련량이 많더라도 다섯, 여섯 시간 한 숨 자고 나면 피로를 못 느껴요. 그럴 나이에요. 왜냐면 숙면을 취해요. 그러니까 밤 늦게까지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또 할 수가 있는 거에요. 하루종일 운동하면은 공부 안하고 운동해도 그… 피로가 안 쌓여요. 한 숨만 자고 나면 그 다음날 또 운동량을 소화할 수 있게끔 그런 체력이 되는거에요. 그래서 그 때 하지 않으면 대학교 들어와서 부터는 하고 싶어도 못해요. 왜냐면 그 정도 해버리면 다음날 피곤해가지고 피로가 쌓여가지고 역효과가 나고 그래서 아니, 프로 있으면서도 학교 올라가고 후배들 만나면 어린 애들, 초중고 그때까지는, 대학교 한 1년까지는 틈만 나면 돌리고 뛰고 던지고 하라고. 틈만 나면 그때 완전히 익혀 놔야지 나중에 편하다고.

 1학년 때,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승했던 게 대통령기 우승 하납니까 ?

 청룡기 두개 였었어요.

 1학년때요 ? 대통령기하고 청룡기. 그럼 2학년 때는요 ? 2학년 때가 청룡기였던 것 같은데요.

 그래요 ? 아아, 1학년 때가 준우승이다. 1학년 때 준우승, 2학년 때 청룡기하고 황금사자기 우승 아닙니까 ?

   맞습니다.

 황금사자기죠 ? 그 황금사자기가 아주 '빅게임' 이었어요.

 그거 빅게임이죠 ? 좀 있다 얘기 하겠습니다. 3학년 때는 두 번 준우승시고요..

 세 번.

 세번이십니까 ?

 봉황기…. 봉황기… 아…

  청룡기하고 봉황기하고…

 아.. 화랑대기. 부산에서 한 거. 그 당시 서울시에선 무패였고.

 그, 그때는 보통 네 개가 메이저대회 아닙니까 ? 대통령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

 그렇죠. 서울대회는요.

 그때 가장 애착이 갔던 대회가 어느 대회였습니까 ?

 봉황대기였어요.

 왜그랬죠 ?

 전국. 예선 없이 전국의 모든 팀이 토너먼트로 올라와 가지고 하는 거니까 '왕중왕'이죠. 의미가 있는 대회죠..

 그때 고등학교 다니면서 제일 라이벌이던 팀은 어떤 팀이었습니까 ?

 그때 라이벌.. 서울에서는 신일고등학교가 야구를 잘 했어요. 신일고등학교가 그때 당시 고3때는, 그때 감독이 김성근씨였어요. 야구를 아주 이기는 게임을 많이 하는… 아주 게임이 아주 힘들었어요. 신일고등학교. 고3때 경북고등학교한테 두 번인가 져 가지고 준우승을 했는데 그 팀은 라이벌로 생각은 안하고, 왜냐 하면 우리보다 전력이 떨어지거든요. 멤버상으로는 사실 질 이유가 없었어요. 멤버상으로는. 그런데, 1학년 때는 박영진 감독이었어요. 지금 KBO 감독관하시는. 그분이 계속 지도를 했으면 계속, 팀에 계속 3년 동안 계셨으면은 3년 동안 팍 쓸어 버렸을 거에요. 근데 그 분이 어, 타의에 의해 가지고 나가시게 되셨어요. 그래서 구본호 감독님이 들어와서… 구본호 감독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싫다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뭐였냐 면은, 그분이 선린상고-고대를 나와서 10년 동안 현장을 떠나있었어요. 현역에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바로 선린상고를 맡은 거에요. 그러니까 야구에 대한 감각도 떨어지고 사실 '펑고'도 하나 제대로 못 치셨어요. 그래서 차라리 고 2때, 고 3때, 고 2때 두번이나 우승 한 거도 멤버가 너무나 좋아 가지고 그래서 한 건데 고 3때도… 그때도 그냥 가만히 앉아만 계셨어도.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우리가 오더를 짜고 우리가 작전을 했어도,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게임을 했어도 충분히 이길수 있는… 지금 그분에 대해서는 좀 그 하지만은, 안계셔서 좀 그렇지만은 그런 상황이었어요. 굉장히 안타까웠어요. 그래, 이제 그것이 어, 나중에는 고 3 그 좋은 멤버들을 어 9월까지… 보통 멤버가 괜찮으면 3학년 초에 2, 3월에 대학이 다 결정이 되야 돼요. 9월까지 대학을 결정을 못한 거에요. 선수들을… 이제 실력이 없어서, 오라는 데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검은' 그런 게 있어요. 주고 받고 그런, 뭐 장학금도 좀 내라고.. 선수들이 너무 그래 가지고 쫓아내버렸어요. 스트라이크 일으켜 가지고. 그래 가지고 마지막대회 황금사자기인가를 아마 감독 없이 했다는, 아마 다른 감독인가 들어갔을 거에요. 제가 병원에 있을 때.

 고등학교 때 박코치님 최대의 라이벌 선수는 ? 고3때로 치죠. 한명 꼽으라면 누구입니까 ? '내가 얘한테만은 지기 싫었다..' 하던 선수?

 그런 애는 없었어요. 건방진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 나는 최고라고 생각을 했고 난 라이벌은 내 주위에는 없다.. 실업 팀, 대학 팀 선배든 그것이 지금도 그렇지만은 주위에, 옆에 라이벌 비슷한 사람이 그 사람보고 아웅 다웅 해봐야 그 그릇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저 위를 보고 쫓아가야지, 쫓아가다 보면 그 사람은 못 따라온다고요. 못 쫓아온다고요.. 나를. 나는 어느 정도 올라가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때 당시 건우가 있었는데 그런 '라이벌' 얘기를 많이 해요. 비슷하니까. 근데 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기자들, 그 당시 기자들 기사거리. 잡지나 신문이나 기사거리를 많이 넣으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참..

 여기 청룡기 우승한 난 다음에 성준선수 인터뷰에 "박노준이한테는 죽어도 지기 싫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있었어요.

 그 친구 아마 그랬을 거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하여튼, 했다 하면 지니까. 나는 전혀 생각을 안 하는데, 그 친구는 그런 생각을…. 나중에 대학 와서…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대학 와서… 또 스타일이, 그 친구는 공이 빠른 스타일은 아니고.. 나는 빠르게 던졌다고 그러니까 전혀 염두에 안 뒀었죠.

 고등학교때 투수로서 주무기가 '슬라이더' ?

 슬라이더. 빠른 슬라이더. 똑같이 직구에서 오다가  몸쪽으로 요만큼 떨어지는 슬라이던데 직구하고 거의 비슷하니까 그냥 헛스윙이 많은 거에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경기는 언제에요 ?

 어…  물론 봉황기 결승전 때 다리 부러진 거도 그렇지만, 제일 기쁘고 좋았던 때가 고1때 그 부산상고한테 대통령기 우승할 때… 상대 투수가 윤학길 선밴데, 15:1로 결승전에서 박살을 냈어요. 나 고 1때.

 고 1때는 팀에서 어느 포지션을 ?

 고 1때는 1번타자. 1번타자하면서 피처를 봤는데 그 때 전국대회 첫 대회인데 제일 주목을 많이 해요. 온 국민이 주목을 하는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15:1로 깨고 내가 MVP를 받았어요. 고 1이. 그게 굉장히 뉴스 거리가 된 거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좀 튄 거죠. 지금 생각하면 매스컴이 실력 이상으로 좀 많이 해줬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해요. 왜냐면 프로도 없었고, 마땅한 다른 종목에서도 그만큼, 다른 종목을 다루지도 않았고, 매스컴에서.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을 해요.

 고등학교 때,  뭐 중,고등학교 여학생들 팬이 장난이 아니었잖아요. 고교야구 최초의 오빠부대. 거의 그런 분위기. 코치님 고등학교 3학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다리 그렇게 되시고 한국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원이 아주 여고생 팬들 때문에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그러던데…

 뭐 그것도 어… 전국대회 고교야구, 프로야구가 없었을 때 결승전인데 그 플레이볼 시간이 저녁 6시에요. 평일이었는지 기억은 못하겠는데 저녁 6시면 거의가 집에 들어와 가지고 밥상 받아 가지고 같이 야구를 보던지.. 그럴 시간이라 가지고 시청률도 높았을 거에요. 관심도 많았고. 그런데 그것도 1회에 그렇게 되면 한 6시, 한 20분에서 30분정도 될 시간에 홈에 들어오다가… 그러고 게임 마치고 또 병실에서 또, 난 기억이 안 나서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얘기해 주더라고요. 뉴스, 병실에 와서 생중계를 하고 그래서, 그렇게 해가지고 알려지게 됬어요. 그렇게 해서. 그래 가지고 한국병원앞에 창덕여고가…. 맞죠 ? 있었고, 또 학생들이 아침이고 저녁이고 오다가 들리기도 하고…^^

그 발목 뒤틀린 순간에 생각났던 거 있으세요 ? 아팠던 거는 당연한 거고, 그 외에 무슨..?

 내가 들어올 때가 3-0인가 그랬어요. 들어올 점수가, 제가 들어오는 점수가 지금 나는 3-0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2루에서 뛰어들어오다가… 실질적으로 점수는 나는 모르겠는데, 내가 3-0이라고 기억을 하고 '아, 오늘은 이기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고. 그 다음에 아파 가지고 들어갔는데 이건 웬만큼 아프면 나는 무조건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한 거에요. 부러지지만 않으면. 아마 한참 안에서 나간다 만다 나간다 만다.. 엎드리고 움직이고 그랬을 거에요. 아마, 그 안에서. 결국은 주저 않고 말았는데… 알죠 ?  어떻게 부러졌는지 ?

     복숭아뼈 2개 나가고, 인대 끊어지고.

 예예.. 근데 3-0이면 그래도 이기겠다.. 그리고 이제 이기고 보자. 이따가.  그러고 갔는데 아, 병원에 가 있는데 아주 갑갑하더라고요. TV로 중계를 하니까.

 김건우선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그 선수 떠 올리면 어떤 생각이…

 참… 초, 중,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뭐라고 해야 하나…죽마고우죠, 뭐.  그 친구도 잘 되야 할텐데...


호랑이 소굴

 첫